루돌프 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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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돌프 랑게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장교로, 라트비아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게슈타포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아인자츠그루페 A의 지휘관, 라트비아 보안 경찰 및 SD 사령관을 역임했다. 랑게는 리가 게토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대량 학살에 직접 관여했으며, 반제 회의에 참석하여 유대인 최종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1945년 포즈난 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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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랑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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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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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르틴 프란츠 루돌프 에르빈 란게 |
출생 | 1910년 4월 18일 |
출생지 | 바이쓰바서, 슐레지엔 주,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
사망 | 1945년 2월 23일 (34세) |
사망지 | 포젠, 바르테가우, 나치 독일 |
사망 원인 | 전사 또는 자살 |
군사 경력 | |
소속 | 슈츠슈타펠 |
복무 기간 | 1936년–1945년 |
계급 | SS-슈탄다르텐퓌러 |
지휘 | Einsatzgruppe A, Einsatzkommando 2 SiPo 및 SD 사령관, 라트비아 SiPo 및 SD 사령관, 바르테란트 |
전투 | 포즈난 전투 (1945) |
수상 | 독일 황금 십자 훈장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
알려진 업적 | 라트비아의 홀로코스트 반제 회의 참석자 |
2. 초기 생애 및 교육
루돌프 랑게는 당시 프로이센 실레지아에 속했던 바이서바서에서 태어나 슈타스푸르트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마쳤다.[1] 이후 할레 대학교,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예나 대학교 등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대학 시절에는 반민주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학생 단체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2] 1932년 첫 법학 시험에 합격한 뒤 법률 서기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3년 말 예나 대학교에서 "고용주의 지시권"에 관한 논문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2] 그는 학위 취득 직전인 1933년 11월 돌격대(SA)에 가입했다.[2] 이후 할레의 게슈타포 사무실에서 법률 훈련을 받고 1936년 두 번째 국가 법학 시험에 합격하며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2]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랑게는 당시 프로이센 실레지아에 속했던 바이서바서(현재 작센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도 건설 감독관이었고, 가족은 개신교 신자였다. 1928년 슈타스푸르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할레 대학교,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에는 반민주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펜싱 클럽 "게르마니아"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차례 결투로 인한 흉터를 얻었다.1932년 7월 첫 번째 국가 법학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마그데부르크, 토르가우, 나움부르크 등지에서 법률 서기로 일했다. "고용주의 지시권"에 관한 논문으로 1933년 12월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학위 취득 직전인 1933년 11월 14일에 돌격대(SA)에 가입했다. 1935년에는 할레의 게슈타포 사무실에서 법률 훈련을 받았으며, 1936년 8월 18일에 두 번째 국가 법학 시험에 합격했다.
2. 2. 학업 및 법학 경력
랑게는 당시 프로이센 실레지아에 속했던 바이스바서(현재 작센주)에서 철도 건설 감독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개신교 신자였다.[1] 1928년 슈타스푸르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할레 대학교,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그는 반민주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펜싱 클럽 '게르마니아'에 가입했으며, 이로 인해 여러 차례 결투 흉터를 얻었다.[2]1932년 7월 첫 번째 국가 법학 시험에 합격했고, 이후 마그데부르크, 토르가우, 나움부르크에서 법률 서기로 일했다.[2] 1933년 11월 14일 돌격대(SA)에 가입했으며,[2] 같은 해 12월에는 '고용주의 지시권'에 대한 논문으로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5년 할레의 게슈타포 사무실에서 법률 훈련을 시작했고, 1936년 8월 18일에 두 번째 국가 법학 시험에 합격했다.[2]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SS에 입대했으며, 1937년 11월 15일에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3. 나치당 및 친위대 경력
루돌프 랑게는 나치당과 친위대(SS)의 일원으로서 게슈타포와 보안국(SD) 등 나치 독일의 핵심 탄압 기구에서 활동했다.
1941년, 랑게는 아인자츠그루펜 A 산하 아인자츠코만도 2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라트비아를 중심으로 한 발트해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지휘 아래 아인자츠코만도 2는 1941년 12월까지 약 6만 명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 범죄를 저질렀다. 랑게는 라트비아 및 리가의 보안경찰 및 SD 사령관으로도 임명되었으며, 특히 리가 교외에서는 약 3만 5천 명이 학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랑게의 이러한 '대량 살육 성과'는 국가보안본부(RSHA) 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높이 평가받아, 1942년 1월 유대인 절멸 계획인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논의한 반제 회의에 참석자로 초대되었다.
이후 1945년까지 리가의 보안 경찰 및 SD 사령관직을 유지하다가, 1945년 1월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의 보안 경찰 및 SD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포젠 방어전에 참전하여 1945년 2월 6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수여받았으나, 전세가 기울자 1945년 2월 23일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히기 직전 자결했다.
3. 1. 초기 활동
프로이센 왕국령 슐레지엔의 바이스바서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후, 슈타스푸르트와 뉘른베르크의 법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했으며, 이 기간 동안 노사 관계에 관한 논문을 써서 예나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933년에 프로이센 주 경찰 게슈타포 국에 합류했으며, 같은 해 나치당의 돌격대 (SA)에 가입했다. 1936년 9월, 랑게는 베를린의 게슈타포 사무소에 시보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경찰에서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그는 1936년 10월 11일 SA를 떠나 친위대 (SS)로 전출했다 (SS 번호 290,308).[1] 1937년 5월 1일에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당원 번호 4,922,869).[1] 1937년 8월, 그는 공무원으로서 정부 변호사가 되었고, 1937년 9월 30일에는 SS 정보 기관인 보안국 (SD)의 직원으로 배치되었다. 랑게는 SS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1937년에 복음주의 개신교회를 떠났다.
1938년 5월, 오스트리아와의 안슐루스 직후, 랑게는 오스트리아 경찰 시스템 인수를 감독하기 위해 빈의 새로운 게슈타포 사무소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나중에 리가에서 그의 지휘관이 된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를 만나 함께 일했다. 랑게는 1938년 7월 6일 SS-하우프트슈름퓌러로 임명되었고, 그해 말에는 슈룸퓌러로 진급했다. 빈에서 그의 주요 임무는 "적과의 싸움", 특히 유대인과 가톨릭 교회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1938년 11월에 발생한 크리스탈나흐트 유대인 학살 당시 빈 유대인에 대한 잔혹한 공격, 체포, 재산 약탈 등 박해에 관여했다. 1939년 6월, 랑게는 슈투트가르트 게슈타포 지역 본부 부장으로 전출되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보안 및 경찰 기관 (오르포 제외)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SS의 국가보안본부 (RSHA)로 통합되었다. 게슈타포는 RSHA의 4국(Amt IV)이 되었고, 하인리히 뮐러는 하이드리히 휘하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되었다. 랑게의 경력은 새로운 RSHA 조직 내에서 계속되었다. 1940년 4월, 그는 하우프트슈름퓌러로 진급했다. 1940년 5월부터 7월까지 그는 바이마르와 에르푸르트의 주 경찰청장 대행을 역임했다.[2] 이어서 카셀에 본부를 둔 국방군관구 IX의 지포 및 SD 감찰관 사무소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17일, 랑게는 발터 블루메 휘하의 베를린 게슈타포 부국장으로 배치되었다. 1941년 4월 20일, 그는 SS-슈투름반퓌러로 진급했다.
3. 2. 게슈타포 경력
1933년 프로이센 주 경찰 게슈타포 국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시작했고, 같은 해 나치당의 돌격대 (SA)에도 가입했다.1936년 9월, 랑게는 베를린의 게슈타포 사무소에 시보 직원으로 고용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에는 친위대(SS)에 입대했다 (SS 번호 290,308). 경찰에서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 그는 SA를 떠났다. 1937년 5월 1일, 그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당원 번호 4,922,869).[1] 1937년 8월, 공무원 신분으로 정부 변호사가 되었고, 9월 30일에는 SS 정보 기관인 보안국(SD)에 배치되었다. 랑게는 SS 이데올로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1937년에 복음주의 개신교회를 떠났다.
1938년 5월, 오스트리아와의 안슐루스 직후, 랑게는 오스트리아 경찰 시스템 인수를 감독하기 위해 빈의 게슈타포 사무소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나중에 리가에서 그의 지휘관이 된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를 만나 함께 일했다. 랑게는 1938년 7월 6일 SS-하우프트슈름퓌러로 임명되었고, 그해 말에는 SS-슈룸퓌러로 진급했다. 빈에서 그의 주요 임무는 유대인과 가톨릭 교회를 포함한 "적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1938년 11월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 당시 빈에서 발생한 유대인에 대한 잔혹한 공격, 체포, 재산 약탈 등 박해 행위에 직접 관여했다. 1939년 6월, 랑게는 슈투트가르트로 전출되어 게슈타포 지역 본부 부장을 맡았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의 보안 및 경찰 기관(오르포 제외)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SS 국가보안본부(RSHA)로 통합되었다. 게슈타포는 RSHA의 제4국(Amt IV)이 되었고, 하인리히 뮐러가 하이드리히 휘하의 게슈타포 책임자가 되었다. 랑게의 경력은 새로운 RSHA 조직 내에서 계속 이어졌다. 1940년 4월, 그는 SS-하우프트슈름퓌러로 다시 진급했다. 1940년 5월부터 7월까지는 바이마르와 에르푸르트의 주 경찰청장 대행을 역임했다.[2] 이후 카셀에 본부를 둔 국방군관구 IX의 지포(Sipo) 및 SD 감찰관 사무소 부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9월 17일, 랑게는 발터 블루메 휘하의 베를린 게슈타포 부국장으로 배치되었다. 1941년 4월 20일, 그는 SS-슈투름반퓌러로 진급했다.
4. 라트비아에서의 홀로코스트 가담
루돌프 랑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라트비아에서 홀로코스트를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1년 6월 아인자츠그루펜 A 소속으로 라트비아에 파견된 그는 아인자츠코만도 2(EK2)의 지휘관을 거쳐, 1941년 12월부터 라트비아 전체의 보안경찰(SiPo) 및 보안국(SD) 지휘관(KdS)으로 활동하며 유대인 학살을 총괄했다.
랑게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퓌러의 기본 명령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리가에 본부를 두고 아라이스 코만도와 같은 라트비아 부역 부대를 직접 지휘하여 옐가바 학살 등 수많은 학살을 자행했다.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을 처리하는 임무를 맡아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 등을 운영했으며, 리가 게토의 유대인 약 2만 5천 명을 학살한 룸불라 학살 (1941년 11월-12월)의 계획과 실행을 주도했다. 또한 다우가프필스 게토의 유대인 학살(1942년 5월)을 명령하는 등 라트비아 내 유대인 절멸 정책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2년 1월에는 유대인 절멸 계획을 논의한 반제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랑게는 1945년 1월까지 라트비아에서 활동하며 가스차 등을 이용한 학살을 지속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소련군의 진격에 대비해 학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존더악치온 1005 작전을 지휘했다.
4. 1. 아인자츠그루페 A 지휘
1941년 6월 5일, 랑게는 비텐베르크 인근 프레츠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당시 SS-여단지도자이자 경찰 소장인 슈탈레커가 지휘하는 아인자츠그루페 A의 지휘부에 배속되었다. 그는 ''아인자츠코만도 2''(EK2)의 분견대(Teilkommando) 지휘관을 맡았다. 랑게는 라트비아에서 소위 "유대인 문제"에 대한 퓌러의 "기본 명령"을 인지하고 있던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랑게 자신은 EK2의 목표가 처음부터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여 유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했다.1941년 12월 3일, 랑게는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의 뒤를 이어 EK2의 지휘관으로 승진했으며, 동시에 신설된 ''라트비아 일반관구''의 보안경찰(SiPo) 및 보안국(SD) 지휘관(Kommandeur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 약칭 KdS)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SD의 제4부(Amt IV, 게슈타포)를 담당했다. 라트비아 점령 정권 하에서는 기관 간 권한 경계가 모호했지만, 랑게는 라트비아 홀로코스트의 주요 실행 책임자로 간주된다.
그의 본부는 리가의 라이머사 거리에 있었다. 랑게는 라트비아에서 활동하며 아라이스 코만도와 같은 현지 부역 부대에 명령을 내려 학살을 자행했다. 아라이스 코만도의 지휘관 빅토르스 아라이스는 랑게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다고 평가된다. 1941년 7월과 8월 옐가바 학살을 저지른 바굴란스 코만도 역시 랑게의 지휘를 받았다. 랑게는 아라이스 코만도가 수행한 처형을 직접 감독했으며, 모든 SD 장교에게 학살에 직접 참여하도록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
나치 정권이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유대인을 동쪽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하자, 랑게는 리가로 이송되는 유대인 처리를 담당했다. 1941년 11월 8일, 그는 오스틀란트의 제국판무관 힌리히 로제에게 유대인 5만 명(리가 2만 5천 명, 벨라루스 2만 5천 명) 이송에 대한 상세 지침을 전달했다. 당초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살라스필스 강제 수용소 건설을 조직했으나, 완공 지연으로 리가 인근 융퍼호프에 임시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를 설치하여 유대인들을 수용했다.
1941년 11월, 랑게는 리가 게토의 라트비아 유대인 약 2만 4천 명을 살해하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이 학살은 11월 30일과 12월 8일 룸불라 숲에서 자행되었으며, 룸불라 학살로 알려져 있다. 이 과정에서 11월 29일 독일에서 첫 열차로 도착한 유대인 약 1천 명도 함께 살해되었다. 12월 3일부터 독일에서 추가로 도착한 유대인들은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랑게의 대량 학살 "성과"는 국가보안본부 장관이자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책임자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높이 평가받아,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 초대되어 유대인 절멸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1942년 5월, 랑게는 SS-대위 귄터 타베르트에게 다우가프필스 게토에 남은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다. 이 작전으로 병자, 어린이, 유아, 병원 직원 등 약 45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으며, 아라이스 코만도 역시 학살에 가담했다.
랑게는 1943년 11월 SS-중령으로 승진했으며, 전쟁 중 철십자 훈장 1급과 2급을 수여받았다.[3] 그는 1945년 1월까지 라트비아에서 KdS로 재직하며 유대인, 유격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학살을 지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스차를 사용하기도 했다. 리가에서의 마지막 임무 중 하나는 존더작전 1005 지휘였다. 이는 진격하는 소련군에게 나치 만행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포로를 동원하여 대량 매장지를 파헤치고 시신을 소각하는 작전이었다.
4. 2. 학살 주도
1941년 6월 5일, 랑게는 비텐베르크의 프레츠슈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당시 SS-여단지도자이자 경찰 소장인 슈탈레커가 지휘하는 아인자츠그루페 A의 지휘부에 배속되었다.[1] 랑게는 아인자츠코만도 2(EK2)의 분견대(Teilkommando) 지휘관이었다.[2] 그는 라트비아에서 소위 "유대인 문제"에 대한 '기본 명령'(Führerbefehl|퓌러베펠de)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4] 랑게 자신은 EK2의 목표가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여 유대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그의 본부는 리가의 라이머사 거리에 있었다. 랑게는 라트비아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독일이 소규모 도시에서 학살을 수행하기 위해 조직한 아라이스 코만도와 같은 라트비아인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2] 역사학자 앤드류 에저가일리스에 따르면, 아라이스 코만도의 지휘관 빅토르스 아라이스는 랑게에게 철저히 통제받았다. 랑게로부터 명령을 받은 또 다른 지역 조직은 바굴란스 코만도였으며, 이 조직은 1941년 7월과 8월에 발생한 옐가바 학살에 책임이 있었다. 랑게는 아라이스 코만도가 수행한 처형을 직접 감독하기도 했으며, 모든 SD 장교가 살해에 직접 참여하도록 명령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치 정권이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을 동쪽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한 후, 랑게는 리가로 오는 추방자들을 수용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와 관련하여 1941년 11월 8일, 그는 오스트란트 제국판무관 힌리히 로제에게 유대인 5만 명을 동쪽으로 수송하는 것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전달했는데, 이 중 2만 5천 명은 리가로, 나머지 2만 5천 명은 벨라루스로 보내졌다. 동시에 랑게는 원래 이 추방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살라스필스 강제 수용소 건설을 조직했다. 그러나 살라스필스 수용소가 유대인 도착 시점까지 준비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랑게는 수송단을 리가 근처의 융퍼호프(Jungfernhof) 또는 윰프라브무이자(Jumpravmuiža)라고 불리는 버려진 영지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곳은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로 설치될 예정이었다.
1941년 11월 말과 12월 초, 랑게는 리가 게토에 남아있던 라트비아 유대인 약 2만 4천 명을 살해하는 계획과 실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학살은 1941년 11월 30일과 12월 8일에 룸불라 숲에서 자행되었으며, 룸불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라트비아 유대인 외에도, 11월 29일 첫 추방 열차로 독일에서 온 유대인 약 1천 명도 함께 살해되었다. 11월 29일 열차 이후 12월 3일부터 독일에서 유대인을 실은 추가 열차들이 리가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수송된 유대인들은 게토 대신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1년 12월 3일, 랑게는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의 뒤를 이어 EK2의 지휘관으로 승진했다.[2] 동시에 그는 새롭게 설립된 라트비아 일반관구에서 보안경찰(SiPo) 및 보안국(SD)의 지휘관(Kommandeur der Sicherheitspolizei und des SD, 약칭 KdS)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SD의 제4부서(유대인 문제 담당)를 책임졌다.[2] 라트비아 점령 정권 하에서는 기관 간 권한 경계가 모호했지만, 랑게는 라트비아 홀로코스트의 주요 가해자 중 한 명으로 널리 평가받는다.
랑게의 대량 학살 성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의 전권을 위임받은 국가보안본부(RSHA) 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1942년 1월 20일, 랑게는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반제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유럽 유대인 절멸 계획인 라인하르트 작전을 조율하고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1942년 5월, 랑게는 SS-대위 귄터 타베르트에게 다우가프필스 게토에 남아 있는 유대인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 이 작전으로 아픈 사람, 어린이, 유아, 병원 직원을 포함한 약 45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타베르트 외에도 라트비아의 아라이스 코만도가 이 살해 작전의 주요 실행 부대였다.
랑게는 1943년 11월 SS-중령으로 승진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을 수여받았다.[3] 그는 1945년 1월까지 라트비아에서 SiPo 및 SD 지휘관으로 재직하며 유대인, 유격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살해 작전을 계속 지휘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스차를 사용하기도 했다. 리가에서의 그의 마지막 임무 중 하나는 진격하는 소련군에게 학살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포로를 동원하여 대량 매장지를 발굴하고 시체를 소각하는 작전인 존더악치온 1005였다.
1945년 1월, 랑게는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의 SiPo 및 SD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포젠 방어전에 참전하여 1945년 2월 6일에는 독일 십자 훈장 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전세가 기울자 1945년 2월 23일, 포젠이 함락되기 직전 자결했다.
4. 3. 강제 수용소 운영
나치 정권이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을 동쪽으로 추방하기로 결정하자, 랑게는 리가로 오는 추방자들을 수용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941년 11월 8일, 그는 ''제국판무관 오스틀란트''인 힌리히 로제에게 유대인 5만 명을 동쪽으로 수송하는 것에 대한 상세한 지침을 전달했다. 이 계획에 따라 2만 5천 명은 리가로, 나머지 2만 5천 명은 벨라루스로 보내질 예정이었다.랑게는 원래 이 추방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살라스필스 강제 수용소 건설을 조직했다. 그러나 살라스필스 수용소가 유대인 도착 시점까지 준비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자, 랑게는 수송단을 리가 근처 융퍼호프(Jumpramuiza)라고 불리는 버려진 영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이후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1941년 11월 말, 랑게는 리가 게토에 거주하던 라트비아 유대인 2만 4천 명을 살해하는 계획과 실행에 깊이 관여했다. 이 학살은 1941년 11월 30일과 12월 8일에 걸쳐 룸불라 숲에서 자행되었으며, 룸불라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학살에는 라트비아 유대인뿐만 아니라, 11월 29일 독일에서 첫 추방 열차를 타고 도착한 유대인 1천 명도 포함되었다. 12월 3일부터 독일에서 유대인을 실은 추가 열차들이 리가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도착자들은 게토가 아닌 융퍼호프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2년 5월, 랑게는 SS-''대위'' 귄터 타베르트에게 다우가프필스 게토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작전으로 아픈 사람, 어린이, 유아, 병원 직원을 포함한 약 450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이 살해 작전에는 라트비아인 부대인 아라이스 코만도도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랑게는 1945년 1월까지 라트비아에서 보안경찰(SiPo) 및 보안국(SD) 지휘관(KdS)으로 재직하면서 유대인, 유격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살해 작전을 지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가스차를 사용하기도 했다.[3] 리가에서 철수하기 직전 그의 마지막 임무 중 하나는 존더악치온 1005 작전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이는 진격하는 소련군에게 나치 만행의 증거가 발각되지 않도록 포로들을 동원하여 대량 매장지를 발굴하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소각하는 작전이었다.
5. 반제 회의 참석
랑게는 라트비아 등지에서 자행한 유대인 대량 학살 '성과'를 국가보안본부 장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인정받았다. 이러한 '경험'을 높이 산 하이드리히는 1942년 1월, 이른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즉 유럽 유대인 절멸 계획(라인하르트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주재한 반제 회의에 랑게를 초청했다.
당시 친위대 Sturmbannführer(소령) 계급이었던 랑게는 회의 참석자 중 가장 계급이 낮았으며, 31세로 나이도 가장 어렸다. 회의록에 따르면 랑게는 Reichskommissariat Ostland(동부 국가판무관부)의 보안 경찰(SiPo) 및 SD(보안국) 사령관인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정작 사령관인 슈탈레커는 유대인 추방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리가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의에 초청받지 못했다.
하이드리히는 랑게가 라트비아에서 유대인 대량 학살을 직접 지휘한 경험이 회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리가가 유대인들의 주요 추방 목적지였고, 랑게가 박사 학위를 가진 법률 전문가라는 점도 고려되었다. 이는 비슷한 학살 책임자였던 카를 예거(리투아니아 담당)나 에리히 에를링어(벨라루스 담당) 대신 랑게가 선택된 이유 중 하나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안 커쇼는 그의 저서 "히틀러 1936-1945 네메시스"에서 반제 회의를 다루며 랑게의 이름을 '오토 랑게'로 잘못 기재하기도 했다.[4]
6. 전쟁 후반기와 죽음
1945년 1월 말, 랑게는 바르테란트 제국 대관구의 보안 경찰(SiPo)과 보안국(SD) 사령관(''Befehlshaber'')으로 임명되었다.[2] 바르테란트의 수도인 포젠은 바르샤바와 베를린 사이의 주요 경로에 위치해 있었으며, 독일 수도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소련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되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랑게가 도시에 도착한 직후, 포젠은 붉은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이곳을 "요새 도시"(''Festung'')로 선포했다. 포로로 잡힐 경우 자신의 운명을 예상한 랑게는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경찰에게 광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는 포즈난 전투와 소련군의 도시 포위 공격 중 부상을 입었으며, 1945년 1월 30일 SS-''Standartenführer''로 진급했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2월 6일, 그는 기사 철십자 훈장 다음가는 무공 훈장으로 평가받는 금색 독일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도시의 마지막 요새에 대한 소련군의 최종 공격은 독일 수비대의 잔존 병력에 의한 최후의 방어 이후인 1945년 2월 23일에 시작되었다. 랑게는 이미 전쟁의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 1945년 2월 23일 포젠이 함락되기 직전 자결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상황에 대한 보고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이날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포즈난에 있는 군인 묘지에 묻혔다.
7. 성격 및 평가
랑게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하인리히 히믈러가 가장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하들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랑게가 관리했던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 요제프 버만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랑게는 내가 아는 가장 큰 살인자였다. 그에 대한 책을 쓰는 것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죽었으니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지만, 그는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그는 유대인을 너무 혐오해서 그들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누구도 차량 기지나 다른 곳에서 그를 지나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랑게는 리가 게토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관리자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상급돌격대지도자''(SS-Obersturmbannführer)'' 게르하르트 마이발트의 도움을 받아 수감자 수송 도착을 감독했다. 역사가이자 리가 게토 생존자인 거트루드 슈나이더는 마이발트를 랑게의 "조력자"라고 표현했다. 랑게는 기차 문을 충분히 빨리 열지 못했다는 이유로 베르너 코펠이라는 젊은이를 직접 총으로 쏘아 살해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랑게의 외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금발에 푸른 눈의 마이발트보다 키가 작고 피부가 어두웠지만, 모피 칼라가 달린 제복 코트를 입고 매우 잘생겨 보였고, 영락없는 장교이자 신사처럼 보였다. 새로 온 사람들은 그런 남자가 살인자라고 의심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참조
[1]
웹사이트
SS Seniority List, 1 October 1943
https://www.dws-xip.[...]
1943-10-01
[2]
웹사이트
Dr. Rudolf Lange (1910 – 1945)
https://www.ghwk.de/[...]
[3]
간행물
Lange, Rudolf
https://www.deutsche[...]
Deutsche Biographie
2023
[4]
서적
Hitler 1936-1945 Nemesis
http://books.wwnorto[...]
W.W. Norton & Company, Inc.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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